본문 바로가기

살아있는 한국 신화 -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오래된 이야기 (신동흔) (한겨레출판)

교보문고 전자도서관

 

 

 

 

 

 

 

 

 

신화는 수천 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에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계속해서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기도 하죠. 천 년이 더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즐겨 보는 웹툰 중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각색한 것이 두 편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들을 예정인 그리스 신화와 미학 관련 교양 수업도 흥미로울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여러 나라의 신화 중 가장 많이 접한 것은 그리스 신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신화들에도 관심이 갑니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책도 읽어 본 적이 있고, 중국 역사를 다루는 ‘고우영의 십팔사략’ 1권은 거의 중국 신화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살아있는 한국 신화》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읽으면서 우리 신화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매력으로는 ‘해학’을 들고 싶습니다. 흥부전처럼 민중이 주인공인 조선 후기 고전 소설의 골계미는 유명하죠. 그런데 신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도 해학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으니 이건 참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야기 전체를 직접 읽을 때의 재미를 한두 마디 인용구로 옮겨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사례를 적어 두고 싶습니다.


A와 B의 대화 상황에서 A가 뭔가 제안을 했고, B가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른 방법을 주장하면, A가 “그건 그리하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A가 신이고 B가 인간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소설 같으면 갈등으로 이어질 만도 한데 한쪽이 생각보다 쉽게 인정하면서 저렇게 말하는 상황이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함흥 무녀 김쌍돌이가 구연한 〈창세가〉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창조 신으로 나오는 ‘미륵님’이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을 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방법을 몰랐는지 풀메뚜기, 풀개구리, 새앙쥐 등의 동물들을 ‘잡아다가 정강이를 때리면서’ 방법을 물어봅니다. 아마 이 ‘미륵님’은 굉장히 거대한 신일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을 데려다가 딱히 좋게 말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무시무시하게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강이를 때리면서 물어봤다는 구절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졌습니다.


위의 〈창세가〉처럼 한국 신화 중에는 무속인들이 구연한 것이 많습니다. 저자는 구전을 채록한 원문을 최대한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신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익숙한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접해 온 것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데기(또는 바리공주)는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유명한 신화고 저자도 두 개의 버전을 따로 실을 만큼 중시하고 있습니다. 재작년 수능특강에 일부가 수록되어 있었던 〈세경본풀이〉도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씩씩하고 맹랑하고 똑똑하고 역력” 한 ‘자청비’가 여주인공입니다.


강림도령이 염라대왕을 잡아 온 이야기는 신과 함께 신화편에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동방삭을 잡아 오는 부분은 옛날에 학습만화 ‘Why? 지구’에서 본 기억도 있네요. ‘당금애기’는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 봤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후에 삼신이 됩니다. 당금애기는 전형적인 규방 처녀였는데 어느 날 잘생긴 스님이 동냥을 오자 문틈으로 엿봅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기씨요, 중 구경을 하려거든 문밖에 썩 나서서 보지 문틈으로 보면 나중에 죽어서 지옥으로 갑니다.” 라고 말합니다. “허튼 말로 여겨지지만 (…) 자기 안의 호기심과 욕망을 억누르거나 은폐하지 말고 스스로 당당해지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라는 저자의 해석은 그럴듯했습니다. 현대인이 보기에 이 스님의 이후 행적은 무책임했지만요.


〈원천강본풀이〉는 원천강을 주재하는 신이 되는 ‘오늘이’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오늘이가 시간의 신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름이 더욱 의미심장하다고 말합니다. 원천강본풀이라는 제목과 오늘이라는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어디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재작년 수능특강에서 봤던 〈구복여행〉과 비슷했습니다. 여의주 여러 개를 문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하나만 남기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에도 〈구복여행〉이 잠시 언급됩니다.


〈차사본풀이〉는 위에서 언급한 강림도령 이야기가 나오는 신화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강림도령이 등장하기 이전의 앞부분도 제법 흥미롭습니다. ‘버무왕 아들 삼형제’는 ‘과양생이 각시’에게 살해당한 이후 그녀의 아들들로 환생합니다. 자라서 셋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죽었습니다. 드라마 'SKY 캐슬'의 초반 회차에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이 박영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죠. 다만 〈차사본풀이〉의 삼형제는 과양생이 각시의 자식으로 살 당시 전생에 대한 기억은 없었습니다. 급제를 했다가 죽은 것도 그들의 의도가 아니며 과양생이 각시가 다른 사람이 급제한 줄 알고 “내 앞에서 목숨이 끊어져 모가지가 세 도막으로 부러” 지라고 저주를 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함부로 저주하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