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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 연옥, 천국 (단테 알리기에리 장편서사시) (열린책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 보면 다음에 읽을 책이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에 열린책들에서 펴낸 체호프 희곡선집을 대출할 때 이 세계문학 전집의 다른 책들도 근처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 중 '신곡'이 눈에 띄었습니다. 책 좋아하는 친구가 이 장편 서사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서 익숙한 이름이었거든요.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순서대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세 편 중 지옥 편의 내용이 가장 유명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옥 부분이 그나마 이해하기가 쉬우며 나머지는 더욱 관념적이고 어렵다는 평을 본 기억이 있네요. 그래도 지옥을 다 읽고 나자 나머지 두 권도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졌습니다. 다행히 연옥과 천국도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친절한 주석의 덕택이었습니다.

 

내용은 물론 가상이지만 신곡의 주인공은 시인인 단테 자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1300년에 일주일 동안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을 여행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입니다. 여행은 지옥, 연옥, 천국의 순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때마다 안내자가 있습니다. 지옥과 연옥은 그리스 시대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안내합니다. 최근 이 작품에 대한 TED-Ed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댓글 중에 이 작품은 베르길리우스 팬픽션이라는 유머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작품 내에 베르길리우스를 칭송하며 신뢰와 존경을 드러내는 구절이 많습니다. 천국 구경은 단테의 영원한 사랑 베아트리체와 함께합니다. 세 파트 각각 33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앞에 서곡이 있어서 총 100곡이 됩니다. 열린책들 판본에서는 서곡을 지옥의 제1곡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일부 책들은 이렇게 분류한다고 합니다. 모든 곡은 3행 연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세 줄이 한 단위인 것이죠. 그리고 번역본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각운도 있다고 하네요. 이렇듯 신곡은 형식미도 주목할 만했습니다.

 

지옥, 연옥, 천국의 구조도 아주 체계적입니다. 지옥은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부 층은 다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구의 지하로 파고들어가며 깔때기 형태로 존재합니다. 최하층에는 지구의 중심이 있으며 이곳은 지옥의 왕 루키페르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옥에 들어온 영혼들은 각자의 죄에 맞는 층에 배치됩니다. 연옥은 큰 산으로 남반구 대양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남반구에 사람이 사는 대륙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입니다. 연옥은 7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갈 정도는 아닌 영혼들이 여기로 온다고 하네요.

 

지옥의 형벌은 기본적으로 영원해서, 입구에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연옥에서는 충분한 기간 동안 죄를 씻으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지옥과는 큰 차이가 있는 셈입니다. 이곳의 영혼들도 죄에 따라 다른 층에 배치됩니다. 연옥의 7개 층은 '7대 죄악'이라고도 불리는 '칠죄종'에 대응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 중에 이 칠죄종을 주제로 하는 시리즈가 있어서 이 부분의 내용에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연옥의 7개 둘레에서는 각각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산 꼭대기에는 지상 천국이 있으며 그 위 하늘로 올라가면 본격적인 천국이 나옵니다.

 

이 서사시를 읽으면서 줄거리 자체보다도 단테가 살았던 중세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더 재미있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특히 천국의 구조는 당시의 우주론에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국 편을 보면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놓여 있고 그 주위를 9개의 껍질로 이루어진 하늘이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하느님이 있는 최고의 하늘 엠피레오가 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은 열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확히는 연옥의 꼭대기에 위치한 '지상 천국'도 있긴 하지만요. 천국의 구조가 천동설에 충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단테(1265-1321)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보다도 한참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니까요.

 

천국 편에 반영된 우주론은 가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지지하던 이론이기도 했죠. 이 작품의 세계관은 전체적으로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와 구절들이 인용된 곳이 무수히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처럼 비교적 익숙한 내용도 있었고 향주 3덕과 4추덕처럼 이번에 처음 듣는 개념들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등 기독교의 주요 인물들은 표현을 다채롭게 바꾸어 가며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단테는 기존의 생각을 그저 답습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에는 타락한 교회 권력과 성직자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교황을 지옥에 두기도 할 정도이죠. 지옥의 제8원 셋째 구렁은 아예 "돈을 받고 성직이나 신성한 물건을 거래한 죄인들"의 구역입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책을 쓸 때 주로 사용한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민중의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쓴 글이라는 사실도 눈에 띄었습니다.

 

성경 못지않게 그리스·로마 신화도 자주 차용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같은 유명한 고전 서사시들도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의 인물들도 나옵니다. 이처럼 기독교와 그리스 신화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르네상스와 관련이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책의 뒷표지에 쓰여 있는 소개 문구에도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의 도래를 예고한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테가 살았던 시기에 그의 고향인 피렌체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다는 사실도 신곡의 여러 부분에 반영되었습니다. 당파 싸움이 아주 심각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궬피 파'와 '기벨리니 파'가 싸우다가 한쪽이 이겼고 그 파가 다시 '흑당'과 '백당'으로 분열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많은 가문들이 몰락하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 단테와 같거나 비슷한 시대의 인물들은 주석에 당파나 가문이 쓰여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조선 후기 붕당 정치나 후궁 암투를 다루는 드라마처럼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는 그 정도가 아니었나 봅니다. 아예 당파까지 전쟁을 벌일 정도였으며 '캄팔디노 전투'에는 단테도 참여했습니다.

 

단테의 삶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그는 생각보다 활발하게 정치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당 소속이었던 그는 흑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분열이 심각했던 시대 속에서 단테는 하나의 강력한 제국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죠. 혼란기에 통일된 권력을 기대한 것은 베르길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단테는 '향연', '제정론' 등의 저서에서 제국에 대해 썼습니다. '신곡'에서는 제국에 대한 바람까지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피렌체의 분열 상태를 한탄하는 대목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