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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지음, 김학수 옮김) (문예출판사)

 

 

 

 

 

 

 

 

요즘엔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체호프 희곡선집에 이어 오늘은 '체호프 단편선'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것도 도서관에서 빌렸기 때문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세트에 속하는 다른 책들과 함께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민음사, 열린책들,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 전집이 모두 비슷한 곳에 있기 때문에 그쪽에 가서 무슨 책이 있나 보는 것이 꽤 즐겁습니다.

 

이 책에는 "약혼녀, 골짜기, 귀여운 여인, 정조(貞操), 함정, 상자 속에 든 사나이, 아뉴타, 사모님, 약제사 부인, 우수(憂愁), 복수자(復讐者)" 이렇게 총 11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약혼녀'에서는 사샤가 수상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본인이 말하는 그대로의 의도를 갖고 나쟈에게 접근한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습니다. 사샤는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여주인공 나쟈에게 집을 떠나 대학에 갈 것을 권합니다. 그의 말 중 인상적인 부분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이를테면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뜻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작품을 읽고 검색을 해 보니 「А. П. 체호프의 《약혼녀》 연구 : 《약혼녀》의 성장소설적 읽기」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논문이 나왔습니다. 그냥 볼 수는 없고 DBpia 구독 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골짜기'는 이 책에 있는 소설들 중 길이가 가장 깁니다. 평이한 분위기로 흘러가다가 갑자기 대사건이 터져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인데(어쩌면 제가 갖고 있는 '사람'의 기준이 좀 높은지도 모르겠지만요)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놈이 내 땅을 빼앗았지!」 이렇게 말하며, 아크시니야는 끓는 물이 든 국자를 잡고 니키포르에게 퍼부었다." 니키포르는 갓난아이이며 아크시니야가 이렇게 한 이유는 상속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너무 강렬했는지 다 읽고 나서 첫 번째 감상은 '아크시니야 XXX'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인상적인 인물 및 장면들이 있었으므로 좀 더 생각을 깊이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올렌카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기 주관이랄 것이 없어서 그 시점에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방식으로만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올렌카의 언행을 보면 '정말로 귀엽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녀처럼 살고 싶지는 않네요.

 

'함정'에는 성격이 올렌카와 정반대라 할 수 있는 여자인 수산나 모이세예브나가 등장합니다. 거칠게 말해 올렌카는 전근대적이고 수산나는 현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수산나의 언행은 대담하고 자유분방합니다. 그래서 소콜리스키와 그의 사촌 형인 크류코프는 그녀에게 매료됩니다. 소콜리스키는 약혼녀가 있는 육군 중위이고 크류코프는 결혼도 한 사람인데 말이죠.

 

'정조(貞操)'의 여주인공 소피아 페트로브나의 심리는 좀 복잡합니다. 일리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호기심인지 이 중 여럿이 섞인 건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상자 속에 든 사나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의 그리스어 교사 '베리코프'가 중심 화제가 됩니다.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인물의 말을 통해 언급됩니다. 그의 성격을 요약하기에 적합하면서 이 단편의 제목과도 관련 있는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요컨대 이 사나이에게서는 항상 무엇으로라도 몸을 감싸는, 말하자면 자기를 외계의 영향에서 격리시켜 보호해줄 상자 같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좀처럼 타파하기 어려운 변함없는 성벽(性癖)을 엿볼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상자로 자신을 감싸는 경향'은 베리코프의 개인적 특성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이와 관련된 문장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숨막힐 지경으로 답답한 거리에서 살며, 필요 없는 서류를 작성하고, 카드 놀이를 하는 것도 역시 상자와 다름없는 일이 아닐까요? 또 우리가 게으름뱅이, 수다쟁이, 영리하지 못하고 체신 없는 부인들과 일생을 보내며, 쓸데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도, 일종의 상자가 아닐까요?"

 

'아뉴타', '사모님', '약제사 부인', '우수(憂愁)', '복수자(復讐者)'는 모두 10페이지 내외의 아주 짧은 단편 소설들입니다. 이 책 마지막 부분의 작품 해설에 나오는 소품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이 중 '우수'는 특히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마부 일을 하는 요나는 얼마 전에 아들이 죽었고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말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하소연을 들어 줄 의무는 없으니까요. 그들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가 아니라 요나의 마차를 타고 가는 손님, 숙소의 다른 마부 등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슬픔을 토로할 수 없는 그의 심경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개인사를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요나가 도시에 있다는 것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